본문 바로가기
Library/영화와영상_film_video

[건축다큐멘터리] BAUHAUS SPIRIT: 100 YEARS OF BAUHAUS

by 프프콩 2019. 6. 25.



BAUHAUS SPIRIT


'바우하우스BAUHAUS'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건축을 공부한 사람은 물론이고, 각종 디자인을 접하다보면 여러번 듣게 되는 '바우하우스'라는 단어. 현대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이며 하나의 정의이고 이론으로 통용되는 단어인 '바우하우스'는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전 독일에 세워진 작은 학교의 이름이다.


얼마전에 본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다큐멘터리 <Ando Tadao - Samurai Architect, 2016>도 그렇고 이번에 본 <Bauhaus Spirit, 2018>도 그렇고 모두 옥수수oksusu 이벤트 무료영화로 감상했다. 너무 고마운 마음이다. 대중영화에 비해서 훨씬 수요가 적을 텐데 이렇게 한 번 씩 잠깐씩이라도 풀어주어서 너무 감사하게 보았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경우 마지막 15분 정도를 보지 못해서 아쉽긴하다. 처음엔 메모를 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전부 다 받아 적어버리자 하며 천천히 보다보니 무료 시간이 지나있었고, 남은 15분 정도는 보지 못한채 감상을 끝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여담이고, 이 바우하우스 다큐멘터리에 대해 요약을 해보자면.

총 94분의 러닝타임의 건축 다큐멘터리로 건축은 물론이고 바우하우스BAUHAUS와 연관된 각종 디자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당시의 상황과 그것이 현재에 끼친 영향, 그리고 현재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벤트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의 인터뷰 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당시에 촬영된 사진과 영상들도 중간중간 나온다는 점.


한편,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면 슬프면서도 화가나기도 한다. 같은 시대의 다른 상황을 돌이켜보면 기분이 좋지않지만, 어쨌든 지금으로 부터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공부하고 좋아할 일이 일어 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또 신기하기도 하다. 


아래부터는 영상을 보며 기록한 거의 대부분을 기록한 스크립트이다.

(※ 별도 표기가 없는 이미지는 영화 스틸컷입니다.)



옥상 테라스,

아동용수영장이 있는 초등학교,

콘크리트로 된 영화 스크린,

내부에는 150m로 뻗은 복도.

337세대의 아파트에 1,600명이 한 지붕아래 살며

슈퍼마켓, 빵집, 미용실, 정육점, 도서관이 모두 사람크기로 지어졌다.

시테 라디외즈 Cite radieuse, 즉 '빛나는 도시'는 마르세유 외곽에 있다. 미래 주거용 건물을 제시하는 작은 도시같은 건물로서 지난세기 건축가 르 코르 뷔지에 Le Corbusier가 구성하고 지은 곳이다.


지구 반대편 콜럼비아 메데인 Medellin의 피카쵸구역.

이 곳에는 25만명이 비좁은 공간에 모여 사는데 주민들이 건설하고 확장한 동네이다. 북부와 남부, 어제 그리고 오늘의 모습이다. 


20세기에는 유토피아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밝은 전망이 가득했다. 문제는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리고 누가 지을 수 있을까였다. 독일 지방의 작은 예술 대학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전망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바우하우스 하면 현대 건축과 아름다운 디자인, 화려한 형태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곳은 무엇보다 학교였고, 이상주의자, 발명가, 몽상가들의 캠퍼스였다. 1930년대 바우하우스의 주창자인 산티 카빈스키 Xanti Schawinsky는 그 목적이 환경설계인지, 세상의 재설계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 때도, 지금도 좋은 질문이다.


1990년대에 스티븐 코바츠 Stephen Kovats는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에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와 전시회를 개발했다.


스티븐 코바츠 Stephen Kovats: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며칠 후 처음 여기 왔을 때 캐나다의 건축학도이던 저는 동독의 바우하우스 건물이 아직 있는지 확실히 몰랐어요. 아직 거기 있는지, 폐허가 됐는지, 막아놨는지도요. 하지만 찾아봐야 했죠. 저에게 바우하우스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어요. 데사우에 도착해서 가까이 가보니 정말 존재하는 곳이었죠. 굉장했어요."


바우하우스 건물은 오늘날에도 아직 건재합니다. 가구와 디자인 작품들은 대부분 미술관과 창고에 보관되어 있죠. 저희로서는 바우하우스가 단지 미술관이 아닌 살아있는 예술작품으로서 오늘날에도 의미있는 기능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야기는 데사우가 아닌 바이마르Weimar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이마르, 괴테, 쉴러. 이보다 더 독일 고전을 떠올리게 하는 곳은 없다. 보수적이고 아주 시골인 이 곳에 베를린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국립 건축학교를 설립했고 현재 바우하우스로 알려진 곳이다. 그 많은 곳 중에서 이 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미래의 대성당과 크리스털로 된 이상향을 건설하고, 제1차 대전의 참사 후 새롭게 시작하길 꿈꾸었으며 뭐든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일에 대한 불만, 영혼과 몸의 분리, 비참한 생활환경도.


비전을 원한다면 선지자가 필요하다. 미래 건설에는 새로운 뛰어난 건축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의 건축가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the new person


토르슈텐 블루메 Torsten Blume / 바우하우스 단계 연구 Bauhaus stage research: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는 1919년에 여러 예술가들을 바우하우스 교수로 임명했고 그 중에는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1866-1944), 라이오넬 파이닝거 Lyonel Feininger(1871-1956), 파울 클레 Paul Klee(1879-1940), 그리고 요하네스 이텐 Johannes Itten(1888-1967)도 있었죠. 요하네스 이텐은 바우하우스에 특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교육자로서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강의에 있어 최고였고, 예비과정을 도입하며 모든 학생들이 첫 학기에 준비 단계로 그 수업을 받게 했습니다. 학생들은 한 학기, 나중에는 두 학기 동안 이텐이 이끄는 재료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죠. 목표는 학생들이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는 겁니다. 자연적인 형태와 기술적인 형태에서도요. 이 뾰족한 가시를 엉겅퀴의 본질로 발견하고 한 편 그 안에 담긴 움직임의 방향과 특성을 철제로 만들어진 톱날과의 공통점에서 찾는 겁니다. 또는 금속판의 유연성, 어두운 목재의 매끈함과 무게감을요. 그 본질이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나뉘고 형성될 수 있는 그 구조의 한 부분임을 발결하는 것이죠. 그 바탕이 되는 개념은 우주와 인간적 차원간에 아름다움이라는 영원한 결합이 있고 예술은 인간의 자아 실현과 인간과 사물간의 조화를 충족시킨다는 겁니다. 그건 비교적 영적이고 난해한 개념입니다. 예비과정에서 학생들은 앞으로 사용할 재료들에 익숙해지도록 주력합니다. 다양한 재료 뿐 아니라 색상도 그 재료에 포함되죠. 그래서 비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화가로서 예비과정에서 색채론을 가르쳤던 것 입니다. 그러나 그림에 관해서가 아니라 건축과 디자인 전반에 있어 기본 요소인 색채에 대해 가르쳤고, 이런 모양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 형태를 짓다보면 어느 순간 이런 형태에서 공간이 만들어 집니다. 색채에는 공간 효과도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우하우스의 목표였습니다. 공간 현상 효과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죠.


크리스티안 미오 로클라이르 Christian Mio Loclair / 안무가 Choreographer: "슐레머Oskar Schlemmer가 오늘날 발레 3부작을 만들었다면 팝핀과 펑크댄서들을 썼을 거예요. 그들은 70년대 부터 기하학적 형태를 활용했죠. 그들로부터 차용해 새로운 공간 탐험 방식을 찾았을 겁니다. 틀림 없어요."

"다른 예술 형태를 들으면 이런말이 나와요. '내 작품에도 그런게 있어' 그리고 그 지점에서 생각을 이어갈 수 있죠.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이런 형태의 사고와 작업에서 다른 이들의 지위와 명성을 두려워 하지 않고 모방하고 발전시키고 바꾸고 시도하고 실험하는 과정. 저는 그 안에 훌륭함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무술을 하는 컴퓨터 공학자라면 스트리트 댄스에서 현대 무용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절호의 순간에 칸딘스키의 책을 선물로 받아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아우를 수 있다. 길마다 진주가 흩뿌려져 있다.


크리스티안 미오 로클라이르 Christian Mio Lochlair / 안무가 Choreographer: "확실히 칸딘스키의 작품에 더 친밀함이 느껴져요. 그의 책 '점, 선, 면'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3년 전이었을 거예요. 필독서라 읽기는 했지만 지금 제가 하는 작업에서도 다시 인식하게 돼요. 제가 하는 것은 모두 수학이자 사물이 그 곳에 있든 아니든 그 장소를 측정하는 것이죠. 수학의 도움을 받아 만드는 작업이 저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시적인 맥락에서도요."



"한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그건 상상할 수 있죠. 그러나 기계로 계산한 뒤 다음 선은 완전히 다르게 하겠다면 갑자기 뒤집히고 수축되고 이쪽으로 이동하고 구석으로 갈 거예요. 별안간 이런 형태가 생기죠. 차례로 격리되며 춤처럼 보이게 돼요."



"안무가가 수학을 활용하는 것과 건축가가 수학을 활용하는 것의 공통점은 일치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일치는 같은 신호를 가진 양쪽에 발생합니다. 균형을 찾으려 하지만 균형과 일치에는 황금 비율이 있죠. 너무 많은가? 정확한가? 원하던 대로인가? 거기서 건축가들의 실험과, 무대의 실험과, 신체의 실험이 만납니다."



the learning body


2011년 디자이너 로전 보쉬 Rosan Bosch는 스톡홀름에서 아이들이 계속 있고 싶어하는 학교를 설계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 결과 교실이 하나도 없는 학교가 만들어졌다.


로잔 보쉬 Rosan Bosch: "저희는 종합 학교로서 예술, 디자인, 건축 분야와 함께 일해요. 디자인을 도구로 삼아 창조하죠. 저희 목표는 예쁜 디자인을 만드는게 아니라 저희 작업물로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사회는 항상 변화하지만 현재 큰 도전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내일의 미래에 가장 잘 대비하려면 아이들이 뭘 배워야 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아이들이 도구 쓰는 법을 배우고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를 배워서 자신감이 생기고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함으로써 배우는게 재미있고, 굉장하고, 좋고, 예쁘다고 느낀다면 미래에 대한 대비로서 최선이죠."


"이 곳은 원래 낡은 산업 시설이었어요. 아주 트여 있지만 공간이 여러 요소로 나뉘어 있죠. 공간속 공간도 있고요. 제 뒤로 푸른산(푸른 계단을 말함)이 보이죠. 학교의 중심으로 일종의 극장이예요. 산 안에는 작은 붉은색의 어두운 영화관이 있어요. 또 동굴같은 공간이기도 해서 들어가 혼자 있을 수 있죠."



"산의 이쪽 면에는 다른 종류의 열린 공간이 있어요. 소규모 그룹 공간인 '집'이죠. 그룹이 모여서 작업하고 대화를 나누는 별도의 공간으로 소위 '캠프파이어' 장소예요. 그리고 저도 학교의 독특한 상징을 갖고 다녀요. 작은 카펫인데 보시다시피 갖고 다닐 수 있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것이야 말로 비트라 학교가 추구하는 핵심이라고 봐요. 학생들에게 수동적이기보다 적극적인 기회를 주는 것이죠. 각자 배우는 것에 따라 가야할 곳을 찾아서 가면 돼요. 산 주위를 걷다 보면 보시다시피 산이 공간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있어요. 창가에 있는 계단은 사람들과 떨어져 있고 싶거나 집중해야 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앉아 있을만한 공간이죠."


"그건 좀 이상한 개념이예요. 정신이 몸에서 분리되어 있고 정신, 뇌로만 배우지 몸으로는 아니라는 것은 완전히 말도 안돼요. 명백하게도 몸은 그것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 외피예요. 우리는 상호 작용을 하고 움직임과 서로 소통하는 방식을 물리적인 공간과 우리를 둘러싼 물체에 따라 바꾸어 가요. 어떤 풍경이냐에 따라 걷는 방식이 달라지고 의사 소통 방식도 우리를 둘러싼 맥락에 따라 바뀌죠. 그래서 저는 디자인에서 중요한 건 몸이라고 생각해요."



"1921년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에 무대 워크숍을 도입했습니다. 그피우스는 건축을 공간 예술로 재창조하려 했죠. 그 목표는 형태와 리듬 구조, 구성, 부피에 대한 문제와 공간 효과를 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이었죠."



"어쨌든 여기서 교육받은 이들은 무용수나 배우들이 아니라,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었어요. 이런 것들을 감지해야 했죠. 선이 어떻게 흐르는지 공간적 긴장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신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신체는 기하학적 구조와 공간에서의 형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상화작용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공간의 형태가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 지는지. 그래야만 제가 여기서 가볍게 만드는 것들을 마지막에 반영할 수 있고,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어느 순간에 통합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상상을 펼치게 되고 모의 실험이 가능해집니다. 곧바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공간과 몸의 배열도 만들 수 있죠."



바우하우스 학교는 바이마르의 이질적은 존재로서 반감의 대상이었고 불안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연을 날렸고 파티를 하며 불량배처럼 돌아다녔다. 그 곳에서 뭘 배우든간에 허튼 짓으로 보였고, 아주 모호했다. 바우하우스는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했기에 1923년 대규모 전시회를 시작했다. 이 때 오스카 슐레머 Oskar Schlemmer는 학교의 계단에 인간에 대한 그의 시각을 담은 벽화를 그렸다.



"계단 전체에 그런 그림을 그렸어요. 천장부터 맨 아래까지. 그런 색조와 색 구성으로 그렸고 흐름과 공간에 대한 슐레머의 인식이 담겨 있는데 이건 사실상 디자인 수업의 일환이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다른 세세한 사람들 처럼 슐레머의 이 그림도 그의 가르침의 일부분이 됐죠. 공간 속의 몸이 움직이는 방식과 규모와 움직임의 기능, 근본적으로 이것은 슐레머의 이론이었습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위의 공간을 정희하는 공간적인 존재라는 것이죠."


결국 1930년에 튀링겐 주정부를 장악한 나치는 모든 그림을 지워버렸다.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미래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학교를 옮길 곳을 찾은 것은 정치적 압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학교가 새로워지길 원했다. 예술적 장인들의 시각에서 벗어나 산업계와 협력하고자 했다. 바이마르의 호른 건물은 이러한 운동의 새 표어를 구체적으로 보인 사례였다. '예술과 공학의 새로운 조화'. 예술가와 공학자는 함께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바우하우스는 1925년 당시 독일의 첨단 기술 중심지 중 한 곳인 공업도시 데사우로 학교를 옮겼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새 학교 건물이 지어지는 동안 바우하우스 학생들은 이미 내부 장치들을 작업 중이었다. 그렇게 세워진 건물은 거의 공중에 떠 있었고 이성과 아름다움의 조화라는 개념의 구현으로 보였다.



"알다시피 이 건물은 일종의 실험이었고 건축 그 자체의 실험이자, 학생들을 위한 실험이었죠. 마차, 기계처럼 건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모두 기계로 움직이고 산업화된 요소들로 되어 있죠. 산업 시대로 도약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예술 장인적 뿌리에서 멀어졌고 이 건물로 곧장 산업 시대로 도약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일종의 건축 기반 종합예술작품으로 건축과 시설 설계에 모두가 참여했습니다. 이 강당 좌석의 경우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설계하고 직접 설치하고 시험까지 했죠. 이 또한 직물과 재료의 기능을 알아보려는 실험이었습니다."



"모호이너지 Moholy-Nagy는 조명 설비를 설계하고 시험, 도입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우하우스는 '개념, 증명이었다고 할 수있죠. 여기서는 기회가 있었어요. 학생들과 작업했기 때문에 당장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시험할 수 있었죠."



"바우하우스에는 다양한 작업장이 있었어요. 목공작업장, 인쇄 작업장, 직조 작업장. 이 곳에서 학생들은 이론으로 배울 걸 실습할 수 있었죠. 이로써 대안 교육의 표어인 '실행으로 배운다 Learning by Doing'가 생겨났어요. 예술 감독 다음으로 기능장인이 학생들의 기술적은 면을 담당했고 공부를 마치면 공인 기능공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그로피우스가 자신을 포함한 바우하우스 교수들은 여학생들 대부분을 강제로 직조 작업장에 보냈는데 유일하게 마리아네 브란트만 모호이너지의 금속 작업장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the community





"마리아네 브란트의 이 방을 보면 공동체 의식이 엿보입니다. 바우하우스의 주거 공간이, 아틀리에는 학생들과 선생님들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갖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엄청난 불협화음이 생겨났죠. 이 벽은 구멍이 많아서 방음이 전혀 안되다 보니 건물의 모든 소리가 다 들렸어요."




"발코니도 방의 아주 중요한 요소였어요. 의사 소통 구조의 일부였고, 바우하우스의 기본 개념의 일부로서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 하고 손을 흔들 수 있고 아직 벽을 통해 서로 인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밖에 나와서 할 수 있죠. 바우하우스가 본질적으로 이런 다양한 의미를 서로 연결했듯이 발코니는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요소이자 건물 전체를 통한 수직적 의사 소통을 끌어내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건설과 설계에 앞서 그로비우스는 이 학교 자체가 일과 생활의 공동체로서 새로운 생활방식을 구현하길 바랐습니다. 축제는 연극 작품과 같았고 공동체에 첫 선을 보인다음 나중에 점점 더 많은 관객들을 초대했어요. 주제가 있었죠. 금속 축제, 더러운 축제, 슬로건 축제, 데사우에서 가장 먼저 열린 화이트 축제, 이런 주제를 동기로 해서 그에 어울리는 의상을 제작했죠. 오늘 블루 축제에 쓸 파란 가면을 만들듯이요."


building blocks


"기본적인 본질은 성장하는 집입니다. 사전 계획된 조립식 주책 모듈로 이상적으로 지어졌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조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규모의 집짓기 블록이며 1923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했습니다. 이미 상상이 되실 겁니다. 이 집짓기 블록들이 어떻게 데사우에 있는 마이스터의 집이 될지 말이죠. 이건 기본적으로 두 세대용 마이스터 집의 반입니다. 나머지 반은 이쪽에 있는게 상상이 되시죠."



"집짓기 블록을 사용하는 순간 그 블록이 조건을 설정합니다. 설계의 매개 변수도요.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집짓기 블록이 없었다면 이렇게 못나왔을 겁니다. 아주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집이 조립되었죠. 집짓기 블록 방식의 사고는 현대 건축의 발전에 근본이 됩니다. 그 배경이 된 발상은 조립식 개별 요소들을 사용해 연속적으로 대량 샌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죠. 결구 그 배경의 발상은 또한 기계와 자동화의 정확한 논리로 인해 기계화는 인간의 생활을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풍요롭게 하는 차원이라는 겁니다. 자연과 유기적인 성장에서 뿐만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 기술적인 사고를 통해서도 발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전에 이곳에 있던 그로피우스 마이스터의 집, 교장 관저였던 그 곳은 전쟁중에 파괴되었습니다. 이후에 이 곳엔 동독식 작은집이 있었고 아주 평범한 가정집이었죠. 인접한 마이스터의 집도 폭격으로 반쯤 파괴됐어요. 제가 왔을 때 이곳은 모두 일반적인 주거용 주택이었죠. 몇 년 전에 추상적인 요소가 더해짐으로써 이 전체가 총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마이스터의 집은 현대적인 주거용 주택의 모델로 여겨졌다. 그로피우스의 부인인 이제와 친구들은 현대 생활의 문화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육용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똑똑하게 지은 아름다운집에서 살 수 없었다. 실상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데사우의 퇴르텐 구역에 첫 번째 연립 주택을 지었고,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생산하듯 건축되었다. 각 아파트는 이틀 내에 지어졌다. 현장 감독은 엔지니어 에른스트 노이페르트르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학교 건물 건설 감독이기도 했다.


"표준이 없다면 현대 산업의 근간인 모듈 방식 체계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에른스트 노이페르트의 '건축가의 데이터'의 표준에 포함된 이 모든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건축의 모든 요소와 건물, 방,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모두 측정해놨어요. 매우 정밀하게 작성되어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과 함께 이상적인 공간의 크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공간에서 웨이터가 지나가려면 의자를 뒤로 얼마나 밀 수 있을지도 알 수 있어요. 여길보면 두루마리 화장지는 17cm x 26cm, 바닥에서 70cm높이에 걸려 있어야 합니다. 너무 크면 안 들어맞고 너무 작아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길 보면 몸에 수건을 두르고 등의 물기를 잘 닦기에 최적인 공간이 나와 있습니다. 당연히 욕조와 벽 사이의 공간은 욕조 청소하려고 몸을 굽힐 때 아주 유용합니다. 이것은 독일의 기준과 표준의 역사를 담은 카탈로그인 셈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최소한의 재료를 써서 효율적인 공간을 만들 것인가, 이것이 소위 노이페르트의 표어였죠."


the residence


안톤 부인: "그 곳은 부자들을 위한 주택이 아니었어요. '다소 전원풍의 주택단지'였죠. 닭과 토끼를 기를 곳이었고, 실제로 길렀어요. 염소도 가능했지만 돼지까지는 아니고요. 저는 그로피우스를 지지하고 지어질 당시에 있던 비판이 탐탁치 않아요. 아주 대단한 일이었죠. 다른 집들과 달랐어요. 모두 똑같이 페인트칠되었고 나중에 벽지를 발랐어요. 여자들은 벽지를 붙이고 싶어했지만 아직 그 정도로 현대적이지는 않았죠. 정말 아름다웠고 천정은 벽과 달랐어요. 그로피우스에 대한 비난은 듣고 싶지 않아요."


안톤 부인은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비좁고 어두운 노동자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정원이 있는 이 작은집으로 이사왔다. 굉장한 발전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집을 9,000마르크에 샀고 1,000마르크를 계약금으로 내야 했는데 힘겨웠어요. 인플레이션이 지나간 직후였죠. 그로피우스가 지은 집은 당시에 실용적이고 편했어요. 지금이라면 다르게 짓겠죠. 더 크게요. 저도 거실이 더 컸으면 하는데 그래도 저희는 좋았어요."


"창문이 당시에 60cm x 240cm 쯤 됐어요. 그 창문들을 다 뜯고 새걸로 교체했어요. 전에 발코니였던 곳을 다 없앴고 철창도 뜯어냈죠. 거실도 넓혔고요. 그리고 헛간도 지었죠.


Van Bo Le-Mentzel, head of the Tiny House University Project, photo by Adam Berry, via The National



판 보레 멘첼 Van Bo Le Mentzel / Architect: "여긴 100유로짜리 아파트예요. 독일에서 가장 작은 아파트죠. 6.4㎡넓이 원룸에 주방, 욕실, 사무실이 있고, 사실상 거실에 살죠. 손님용 침대도 있어요. 예를 들어 이건 갑자기 손님이 올 경우 손님용 침대로 전활할 수 있죠. 이 집은 폭이 2m에요. 여기처럼 작은 아파트는 없을 거예요. 좋은 점인 천장이 높은 것인데 3.6m나 되고 전챙 전에 지어진 옛날 집들 가운데 있을 뿐, 새 집은 그렇게 안 지어요. 효율적이지 않죠. 저희는 이 100유로 아파트를 개발했고, 광고에 초소형 주택으로 나와 있는데, 그게 저희 건축개념이에요. 여긴 전시실이고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해요. 집세가 비싼 도시 중심에 100유로 짜리 아파트를 공급할 수 있고 크기를 통해 그 점을 해결했죠. 아주 작게 만들어서 현재 부동산 시세를 고려할 때 임대료가 100유로 밖에 안돼요. 넓이가 6.4㎡에 불과하지만 주방도 있고, 책상도 있고, 여기서 4-6명이 식사도 할 수 있어요. 거울벽 뒤에 욕실도 있고요. 샤워와 변기, 세면대가 설치된 욕실이에요. 이 위에는 다락이 있어요. 거기서 잠을 자거나 일을 할 수있죠. 제 꿈은 공동체와 이웃을 다시 생각하고 좀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들고 수입에 좀 덜 의존했으면 하는 거에요. 사는 데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봐요. 돈 없어도 모두가 사는 곳에, 도시에 살 권리가 있어야 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가능하다면 집을 작게 만드는 거죠. 너무나 작아서 거의 비용이 안 들 정도로요."


어떻게 모두를 위한 도시를 만들 것인가? 건축가와 도시 설계가들의 집단인 '어반 싱크탱크 Urban Think Tank'는 취리히의 학생들과 21세기 도시 개념을 개발 중이다.


후베르트 클룸프너 Hubert Klumpner / Urban Think Tank: "건축의 새로운 세대가 적극 참여하고 관심을 갖게 하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해하도록 교육하고 직업면에서 준비시켜야 합니다. 더 이상 스위스 교외에 많은 땅을 차지하며 단독으로 지어지고 지붕에 광전지 패널을 단 친환경 주택을 짓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the cities


남미에서는 인구의 95%가 도시에 산다. 시골에서는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다. 그들은 도시로 탈출해 허름한 집을 지을 땅을 찾는다. '어반 싱크탱크'는 20년 동안 남반구의 슬럼가에서 일해왔다.


콜럼비아 메데인.


후베르트 클룸프너: "전통적인 도시의 건설은 토지 소유권을 획득하고 도시 계획을 세우고 집을 짓고 들어가 사는 겁니다. 슬럼가는 정 반대에요. 아무것도 없이 땅에 들어와서 집을 짓고 살면 어느 순간 토지 소유권을 갖게 되요. 이렇게 전도된 상황에서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규정과 기준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혁신을 이룰 곳이 되는 겁니다."


알프레도 브릴렘부르크 Alfredo Brillembourg / Urban-Think Tank: "바로 앞에 가스탱크가 있고 저 위로 버스 터미널이 있어요. 지하철 역에서 좀 더 가면 기차역이 있고 버스터미널이 있어요. 이 다리를 건너서 오가죠.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맨 처음 도착하는 구역이 모라비아 구역과 더 위에 있는 오아시스 구역이에요. 지금 소위 임시주택, 가설 주택이 시작된 곳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죠. 첫 단계 주택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도시에 오기로 하면 처음 밟는 단계에요."






더 보면 좋은 글

한 세기의 실험을 기념하는 방법 / design house
http://mdesign.designhouse.co.kr/article/article_view/108/79621


반응형